안동포 대를 잇는 사람들
할머니와 할머니, 또 그 할머니의 할머니
삼베는 세계의 거의 모든 인류에게 가장 오랫동안 가장 폭넓게 사용된 섬유이자 우리 민족에게 가장 친숙한 옷감입니다.
특히 경북 안동은 기후와 토질이 대마 재배 조건에 가장 적합하며, 상고시대 낙동강 유역 일부 농가에서 야생 대마를 재배하여 안동포에 가까운 옷감을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삼베는 신라 화랑들이 즐겨 입었으며 옛 무덤에서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지닌 마포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신라 때부터 삼베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청자, 조선백자, 측우기, 팔만대장경 등등.
우리에게는 전 세계 어디에 가져다 놓아도 자랑할 만한 훌륭한 문화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국보 1호, 보물 1호라고 정해진 것 이외에도 문화재라고 불리는 물건이나 건물을 대할 때 느껴지는 감정은 단순히 '아, 참으로 오래되었고 가치가 있는 물건이구나!'라는 감탄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앞서 살아간 우리 조상의 손길과 숨결이 녹아있고,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세월의 한 조각이 바로 문화재입니다. 퍼즐 맞추기처럼 그러한 조각이 모이고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 역사가 됩니다.
손에서 손으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져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전통 공예 분야에 이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전통 공예 기술들은 지금 진화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진화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이 기술을 보유한 장인들은 평생을 다 바쳐 과거로 퇴행하고자 노력합니다.
전통 공예 기술은 이미 수백 년 전 진화의 최고점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손만이 최고의 공예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건, 공예 제작 과정에 여러 가지 기계를 도입해 본 후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어떤 기계로도 오래전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공예 기술이 절정에 달했던 시절, 그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작품들은 당연히 지금 문화재가 되었지만, 그 작품을 만들었던 장인의 손끝에서 나오는 정교함과 숙련됨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져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기술은 무형문화재가 되었고, 무형문화재를 보유하여 기술을 전수하는 사람들은 인간문화재가 되었습니다.
‘안동포짜기’는 바로 안동 아낙네들의 애환, 자체입니다.
안동포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도 가난하고 힘들었던 여자들의 이야기. 안동포 한 필이 손재주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참고 참아야만 했던 여자들의 한이 씨줄이 되고, 키우고 먹여야 했던 자식에 대한 사랑이 날줄이 되어, 그렇게 짜였습니다.
무형문화재인 '안동포 짜기'는 바로 안동 아낙네들의 애환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 안에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그리고 그 안에서 아름다운 문화의 발자취를 남겨 온 장인정신이 깃들여 있습니다. 전수하며 손끝을 이어온 그들은 오늘도 모든 기계 문명의 호화스러움과 편리함을 사양한 채, 그들의 손끝을 통해서 절정의 아름다움이 피워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길쌈이라 하는 베 짜기는 모든 것을 자급자족했던 지난 몇천 년 동안 어느 집, 어느 고장에서나 어머니들에게 이어져 내려온 어머니들의 삶이자 필수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길쌈들이 이제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18세기 이후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안동포. 한산모시 곡성 돌실나이. 나주 샛골나이 등만이 지금까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딸깍 시르릉… 딸깍 시르릉….’
외딴 마을 창틀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불빛과 함께 나지막이 들려오던 삼베 짜는 소리는 잊힌 선조들의 숨결소리 마냥 정겨웠었습니다.
수백 가닥 삼베 날줄 사이로 한 올 한 올 씨줄을 엮는 베 짜기는 우리 할머니들의 일상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간해서 보기 힘든 잊혀 가는 추억이 된 지 오래입니다.
삼베를 비롯한 명주·무명·모시를 짜던 ‘베틀’은 이제 박물관에서나 만나 볼 수 있을 만큼 낯섭니다. 더구나 북(씨줄이 될 실타래를 넣는 홈이 파인 나무통)이니 바디(씨줄을 한 올 한 올 날줄 속으로 밀어 삼베로 엮어 주는 장치)니 말코(짜인 삼베를 감아 주는 장치)니 하는 부품의 이름은 아예 생경하기조차 합니다.
소중히 지켜가야 할 것들이 우리의 무관심과 망각 속에서. 그리고 세월의 무게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지는 않은가요? 한 가닥 한 가닥 모진 한과 눈물로 이어가는 삼베.
눈물 한 방울 정성 두 방울이 모여 이루어낸 올 곱고 까슬까슬한 삼베의 촉감 한번 입어본 사람은 다른 옷감을 찾지 않는다는 안동포는 재주와 재치와 기능을 가진 직녀들이 손을 놓음으로써 역사 저 편으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민족혼이 깃든 정신적 자산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이 해야 할 우리들의 몫입니다.